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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포도엽서

June 30, 2023 . 사모하는교회 오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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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나무]


오석환 목사님(Robert Oh. 시인. 교수)은 일 년 두 차례 선교지(캄보디아)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면 항시 사모하는교회를 방문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목사님 말씀 중에 오이나무 이야기가 어찌된 일인지 머릿속을 헤집고 있습니다.   


목사님 집 텃밭에 오이나무를 심고 그 날 주일에도 그 텃밭에서 수확한 오이, 고추를 가지고 와 식사 시간에 함께 나눴습니다. 목사님이 심은 오이나무는 총 아홉 그루입니다. 목사님은 심은 오이나무에 일일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순차적으로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 구순이로 이름 지었습니다. 


심겨진 오이는 오이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이 주인에 의해 무조건 심겨졌으며 이름 역시 오이나무와 상의해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주인인 목사님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시간과 시간이 덧칠해지면서 오이나무는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는 빛 좋은 명당자리에 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주인은 오이를 많이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순이입니다. 햇빛도 잘 들지 않고 그늘 진 가장 열악한 장소에 심겨졌습니다. 주인은 이미 구순이를 심을 때 일순이, 이순이 보다 오이를 많이 맺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단 하나 오이를 영글게 한다 해도 기적입니다.   


목사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 후 심은 오이나무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곁에 잡초를 뽑아 주고 열매를 잘 맺게 하기 위해 손때를 묻혔습니다. 일순이 부터 순차적으로 대화를 하다가 구순이 앞에서는 더욱 목사님 마음이 술렁거렸습니다.  


힘겨운 환경과 열악한 공간에서 애를 쓰며 오이 열매를 맺기 위해 몸부림치는 구순이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살피며 마음을 퍼 날랐습니다. 당연히 그 장소에서 열매가 맺히고 안 맺히고는 주인이 더 잘고 있는 지식입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구순이는 오이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오이를 하나라도 영글게 하려고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한 번도 구순이가 일순이처럼 많은 오이를 생산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구순이가 오이를 일순이 보다 더 많은 오이를 생산하려면 주인이 그 자리를 바꿔 옮겨심기 까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구순이가 존재해야 될 이유는 텃밭을 위해 주인이 그 장소, 그 공간에 심었기 때문입니다. 구순이가 사라지면 텃밭이라는 이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인이 알고 있는 공간, 주인이 알고 있는 시간, 주인이 알고 있는 열매, 주인이 알고 있는 이름, 주인이 알고 있는 수확, 주인이 알고 있는 애씀, 주인이 알고 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구순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오이를 먹다가 문득 내 자리가 궁금해 졌습니다. 구순이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올려본 하늘이 반쯤 웃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