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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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행악자(criminals)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27:38)과 마가복음(15:27)에는 강도들(robbers)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두 흉악범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적어도 6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숨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사형수 동기였습니다. 성경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And two others, evil-doers, were taken with him to be put to death.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눅23:32).”
‘예수님과 함께’ 사형받기 위해 예수님과 동행 했습니다.
And when they came to the place which is named Golgotha, they put him on the cross, and the evil-doers, one on the right side, and the other on the left.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 23: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두 행악자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공간]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누가복음 23장 33절 이후로 행악자에 대한 정보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39절부터 다시 등장하여 행악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3절과 39절 사이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십자가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차별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도 모두 부정적이었습니다.
누가복은 23장 34절 _ 예수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았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 _ 비웃음: 조롱했습니다. 경멸, 비꼬아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6절 _ 희롱: 놀리고 무시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 _ 모욕: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비방한 내용이 아닙니다. 구속자인 예수님의 심중을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은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역입니다. 그 영역을 침범해서 예수님의 목적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당신이 신이라면, 당신이 구원자라면,”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자’가 아니라고 비방했습니다.
십자가 주변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십자가를 중심으로 인간의 죄성이 낫낫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회복하기에 도저히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회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행악자의 반응]
그렇다면 두 행악자의 행보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지켜본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동조해서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And the thieves who were on the crosses said evil words to him.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
강도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두 행악자 모두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Let the Christ, the King of Israel, come down now from the cross, so that we may see and have belief. And those who were put on crosses with him said evil things against him.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 15:32).”
십자가상에서 강도들 역시 싸잡아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장 39절은 행악자 한 사람만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And one of the evil-doers on the cross, with bitter feeling, said to him, Are you not the Christ? Get yourself and us out of this.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39).”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에서 함께 비방했다는 내용을 상기해 보면 한 사람이 변화를 일으켰다는 증거입니다. 한 사람 행악자가 예수님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그 돌아선 시간이 하루, 일 년 후가 아닙니다. 단 6시간 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짤막한 시간에 한 명 행악자가 회심했습니다.
방금 전 함께 예수님을 모욕했던 행악자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어떤 이유로 그 행악자가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요? 이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강도들과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을 성경이 기술한 것은 죄인을 구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확연히 들어나게 하기 위해서 두 행악자와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논리에 대해 필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용서의 기도]
한 편 강도가 회심한 이유를 성경은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이번에는 순차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되짚어 거꾸로 읽어 올라가다 보면 누가복음 23장 34절 앞에 stop 사인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만약 stop 사인이 지금 보인다면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증거입니다. 34절 앞에 서지 않고 슬그머니 지나갔다면 한 편 강도가 변화된 원인을 찾을 길 없습니다.
And Jesus said, Father, let them have forgiveness, for they have no knowledge of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made division of his clothing among them by the decision of chance.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영어성경은(BBE. NIV)은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명확하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과 맞물립니다.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이 구속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구속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순]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두 갈레로 길로 확연히 나누어졌습니다. 하나의 길에서는 전과 같이 여전히 예수님을 비방, 모욕, 조롱, 희롱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길에서 단 한 사람 행악자의 변화입니다. 십자가 주변에서 구원받은 단 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희소성입니다.
분명 한 명의 행악자가 회심한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경이로운 일입니다. 기묘한 일입니다. 문제는 결과에 주목하다 보면 아무 고민 없이 이 사건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필자의 솔직한 고백은 본문 성경을 읽을 때 마다 마음이 착잡하고 무겁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약돌 하나가 자라 큰 바위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행악자들은 단순 잡범이 아닙니다. 자동차 운전하다가 스피드 티켓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형수입니다. 흉악범입니다. 범죄자입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있습니다. 행악자들은 누군가를 살인한 살인범이거나 방화범이거나 체제전복을 노렸던 정치범 일지모릅니다. 단순 강도가 아닙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 행악자로 인해 누군가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흔이 존재합니다. 그 상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런 행악자가 몇 시간 몇 분 사이에 예수님에게로 돌아섰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삼자인 필자도 이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행악자로부터 피해당한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본문의 내용을 편하게 읽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다시 한 번 고민해야 될 이유입니다.
[당혹]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1명을 살해했습니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일반 대중에게 각인시켰던 사건이었습니다. 검거 당시 유영철은 이미 전과 14범이었습니다. 절도, 강간, 폭력 등 수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체포되고 나서 10년 동안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독방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영철이 안홍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안홍기 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나도 사람을 만날 수 있구나. 새벽부터 일어나 설레는 마음으로 목사님을 기다렸다.”는 유영철의 편지글을 받고 너무나 문학적이며 한 편의 시처럼 느꼈다고 소회했습니다. 살인자 유영철은 이미 시인이 되어있었습니다.
마음이 또 무겁습니다. 편지글에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은 더욱 당혹스러웠습니다. 행악자가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 기이한 소식입니다. 하지만 유영철이 사모하는교회에 출석한다면 필자를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유영철을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행악자를 변화시켜서 성경을 읽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밑에서 구원을 소망하는 부모 없는 한 소녀를 변화시켰다면 그보다 극적인 장면이 없을 텐데, 별 상상을 다해 봅니다.
[확인]
그렇다면 행악자의 구원의 틀에 나를 십자가에 세워 보십시오.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 이상 이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행악자의 변화된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나 역시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이 확인될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할 존재라는 사실이 들어날 것입니다. 인간 우리 역시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할 존재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죄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구에 와서 나를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구나, 그 논리적인 구속의 과정을 행악자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행악자를 구원한 이유와 원인입니다. 그것이 확인되면 이 세상을 함부로 대충 살 수 없습니다. 변화된 행악자가 증언하는 내용을 들어 보십시오. 충격적입니다. 성경을 직접 찾아 확인하십시오.
누가복음 23장 40절 _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_ 하나님의 경외하라.
누가복음 23장 41절 _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_ 예수님만이 길이요 생명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2절 _ 신앙고백입니다 _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누가복음 23장 43절 _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이 보다 더 깊은 구속에 대한 선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신학자가 아닙니다. 목사가 증거 하는 내용도 아닙니다. 행악자가 변화되어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부끄럽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너무 창피한 심정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필자가 목회자라는 신분이 초라해질 정도입니다. 구원에 대한 사려 깊은 증거입니다.
[실례]
1963년 10월 19일 현역육군중령 이득주 일가족 6명을 고재봉이 도끼로 살해했습니다. 당시 고재봉 나이가 27세였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이득주 가족은 고재봉과 인과관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고재봉은 군 복무 중 박모 중령 관사에서 신발을 훔친 것이 들통 나 6개월 징역을 살았습니다. 고재봉은 출소한 후 그 관사를 찾아가 박모 중령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박 중령은 이미 다른 부대로 전근된 상태였습니다.
안국선 목사(당시 집사)는 고재봉의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도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 집사님은 서울구치소에 있던 고재봉에게 성경을 전달을 했습니다. 안국선 집사님은 고재봉을 면회하고 성경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고재봉은 성경을 읽다가 집사님과 나누던 성경의 내용을 접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변화의 자리에서 고재봉의 가슴이 뒤틀렸습니다.
“이 놈들아, 왜 나에게 예수를 알려 주지 않아 사람을 죽이게 했느냐, 교회가 왜 나에게 예수를 전해주지 않았느냐. 내가 미리 예수를 믿었다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5개월 후 1964년 3월 10일 사형 현장에서 고재봉은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찬송을 부르며 생을 작별했습니다. 고재봉은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1800명을 전도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거나,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거나,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거나, 직분자가 직분자되지 못하면 하나님은 흉악범을 사용해서라도 복음이 증거 되게 합니다.
행악자가 돌아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기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인간의 용서는 불안정합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기도에 혜택을 입은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변화된 사람은 변화된 의식으로 삶을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구원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의 줄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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