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1 _ 들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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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omorrow the Lord will do works of wonder among you.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3:5).
여기서 “기이한 일”을 새번역은 “놀라운 일”로 번역했으며 현대인의 성경은 “큰 기적”으로 번역했습니다.
If you are not able to give a decision as to who is responsible for a death, or who is right in a cause, or who gave the first blow in a fight, and there is a division of opinion about it in your town: then go to the place marked out by the Lord your God;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신17:8).”
여기서 고소(송사), 상해(피를 흘렸거나), 폭행(구타)으로 인해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어려운 일”이 히브리어 기이한 일과 같은 단어입니다. 곧 기인한 일은 어려운 일로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판단, 판결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욥기 37장 4절은 기인한 일을 “기묘하신 일” 즉 “오묘한 일로 번역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분석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 말씀대로 섬기는 교회와 여러분에게 필경 하나님이 기이한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대로 성취되기를 축복합니다.
***
성경이 그렇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For you have not been over this way before.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전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수3:4).”
그 길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입니다. 예상치 못한 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주목하고 신중하게 역사의 시작점부터 그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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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로 시작합니다(수1:1). 여호수아 2장 2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Moses my servant is dead; so now get up! Go over Jordan, you and all this people, into the land which I am giving to them, to the children of Israel.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2:2).”
모세가 죽었으니 거기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로운 역사를 이끄는 여호수아에게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장에서 황량한 느낌을 받습니다. 삭막하기 까지 합니다. 출애굽을 이끈 모세의 사역이 빛바랜 느낌입니다. 허무하기까지 합니다. 냉정하기 까지 합니다. 슬픔 감정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 역시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느낌이 오늘 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만의 감정은 아닐지 모릅니다. 당시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의 감정이 궁금해졌습니다. 다음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And Moses at his death was a hundred and twenty years old: his eye had not become clouded, or his natural force become feeble.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
한 마디로 모세의 죽음은 갑작스런 사건이었습니다. 120세 할아버지가 시력이 밝았습니다. 체력도 튼실했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돌연사, 심장마비, 병고, 사고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급히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것이 눈에 띕니다. 다음 성경은 모세의 죽음 앞에 당시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For thirty days the children of Israel were weeping for Moses in the table-lands of Moab, till the days of weeping and sorrow for Moses were ended.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신34:8).”
모세의 죽음 앞에 이스라엘 자손이 슬퍼했습니다. 그 정서의 한계가 현재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정서와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 기록이 단순히 그 감정 노출을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닐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그 정서는 모세의 죽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역사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강조된 문장입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되어지는 것이지 모세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해 주도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역사입니다.
그 사실이 선명해졌습니다.
***
그렇다면 더욱 억울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모세는 사역을 종결하는 그 순간까지 애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형국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공로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헌신하는 우리의 헌신과 포개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관을 잘 이해했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름을 받고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 히브리서까지 포함해서 바울서신이 14권입니다. 그러나 그 공로를 바울은 스스로 단 한 번도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위대하게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역의 성과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이용해 왕 노릇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왕, 성도의 왕으로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리스도 종의 신분을 유지했습니다. 사실 종이라는 단어는 모두 노예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노예가 헬라어 원문과 가까운 단어입니다. 한국어 성경은 모두 종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노예가 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 신분은 모두 노예입니다. 죽음의 문 앞 까지 바울은 노예의 신분을 유지했습니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 역사의 길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노예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성취됩니다. 그 역사에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노예의 신분입니다. 그 관계는 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도하는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앞에 와 있습니다. 그 강만 건너면 그토록 갈망하던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는 순간입니다. 곧 진행될 그 역사적인 사건을 성경은 하나님이 하시는 큰 기적, 놀라운 일, 기사로 표현했습니다.
For tomorrow the Lord will do works of wonder among you.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그렇다면 문제는 그 하나님의 기사를 “어떻게 우리가 경험하느냐?”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사가 우리에게 “어떻게 효력으로 나타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네 가지 키워드를 소개할 것입니다. 그 키워드가 하나님이 기이한 일을 열게 하는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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