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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기생 harlot) 라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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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모하는교회
댓글 0건 조회 1,746회 작성일 21-08-3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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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에 베들레헴 지경에 기근이 심해 나오미(Naomi) 가족은 모압(Moab)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남편(Elimelech)이 사망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두 아들(말론과 기룐 Mahlon and Kilion)은 이방인이었던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0년 후 두 아들도 모압에서 사망했습니다.

 

홀로 남은 나오미의 삶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모압에서 이민 생활을 했지만 모든 것을 잃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감회를 직접 들어 보겠습니다.

 

“And she said to them, Do not let my name be Naomi, but Mara, for the Ruler of all has given me a bitter fate.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심중에 바위섬 하나 박혀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며느리였던 룻(Ruth)이 함께 동행 했습니다. 사실 아들이 살았을 때는 며느리였지만 나오미의 아들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남입니다.

 

룻은 베들레헴에서 거부(지주)였던 보아스(Boaz)와 결혼을 하고 오벳(Obed)을 낳았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재혼을 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오벳을 나오미가 안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피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친손자, 외손자도 아닌 족보에 들어갈 수없는 아이입니다.

 

And Naomi took the child and put her arms round it, and she took care of it.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4:16).”

 

만약 세상에서 가장 행복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는다면 오벳을 품고 있는 나오미의 풍경입니다. 기쁨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최고의 그림입니다. 물론 기업 무르기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미의 삶에 넘치게 담겨있습니다.

 

이웃들의 반응도 흥겹습니다. 나오미를 칭송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진풍파를 이겨낸 인생 말년에 확인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And the women said to Naomi, A blessing on the Lord, who has not let you be this day without a near relation, and may his name be great in Israel.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4:14).”

 

다시 기억을 되돌려 보십시오.

 

오벳의 아버지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Salmon)입니다. 그 살몬의 아내가 여호수아 2장에 최초로 등장했던 라합(Rahab)입니다. 그렇다면 오벳과 라합과의 관계는 친할머니입니다.

 

나오미가 오벳을 안고 그렇게 행복했다면 라합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기쁨의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라합의 품에 안겨있는 오벳의 그림을 마음껏 감상해 보십시오.

 

수년 전 필자 가족은 한국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종화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월급 받은 것을 친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수년이 지난 지금도 손녀가 건넨 돈 봉투를 성경 갈피에 넣어 두고 하루 서너 번씩 꺼내 보는 행복을 말씀합니다.

 

그때 처음 장성한 손자, 손녀와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진을 남겼습니다. 여전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확대해서 걸어 놓은 사진 속 손자, 손녀의 모습을 보며 삶의 의미를 새깁니다.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바라보는 마음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라합이 안고 있는 오벳의 두 그림은 필경 감동이 있습니다.

 

보아스가 거부였다면 당연히 그 시대 풍조로 아버지 살몬도 거부입니다. 라합의 말년 삶도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라합에 대한 말년의 삶의 기록이 전무합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And the son of Salmon by Rahab was Boaz; and the son of Boaz by Ruth was Obed; and the son of Obed was Jesse;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1:5).”

 

왕의 족보에 이름이 등재된 기록에는 기생이라는 꼬리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왕의 족보에 라합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 어떠한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이것 보다 더 좋은 축복이 없습니다. 비교대상이 없는 축복입니다. 라합의 말년을 성경이 침묵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창녀가 신앙인이 되어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간증을 한다 해도 남녀 간에 그 지저분한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감동이 있겠습니까? 듣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 모두 불편할 뿐 아니라 거북한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우상숭배하다 크리스천이 되었다든지,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든지, 무당, 스님, 점쟁이가 믿는 자가 되었다든지, 마약 하던 사람이 회복되었다든지... 그런 유의 간증은 들어봤지만 창녀의 간증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매춘은 숨기고 숨겨도 수치스런 단어입니다. 아무리 창녀 생활을 청산했다해도 그 과거가 들어나면 부정적인 시각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매춘을 했지만 나는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우월감입니다. 과연 우리는 기생 라합 보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까?

 

하나님이 기생이라는 단어를 노출 시킨 것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내 자신을 살피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철저히 검증하라는 경고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기생 라합보다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죄인과 창녀 중 누가 더 고상합니까? 죄인은 본질 상 죽은 존재입니다. 죽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존재입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이 제로입니다. 아니 마이너스 1000입니다.

 

For this reason, as through one man sin came into the world, and death because of sin, and so death came to all men, because all have done evil: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하나님이 기생생활을 청산한 라합의 이름 앞에 기생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해서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소개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도 라합 보다 우위를 선점할 잘난 내용이 인간에게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유는 인간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선에서는 위, 아래 없이 존재론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창녀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죄를 벗는 것도 아닙니다. 깨끗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난 받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의 본질에서 자유로울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생 라합의 구원을 통해 나의 구원이 확이 되어야 합니다. 창녀 보다 못한 나를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야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구에 와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증명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구속을 설명하는 실제가 없습니다.

 

기생 라합의 가치는 왕의 족보에서 라합의 이름으로 기록될 때입니다.

 

왕의 족보 밖에서 아무리 기생, 창녀가 강조 되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왕의 족보에 등재된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원의 최절정입니다.

 

오늘부터 보좌의 라합처럼 당당히 세상을 이기십시오.

 

왕의 후손답게 그 은혜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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