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물 Tear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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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물 Tears of God
그래도 훌륭한 건물이겠지. 상상은 곧 자동차 경적 소리와 함께 묻혀 버렸다. 예배당 중앙 기둥 때문에 목사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상가 건물을 얻어 시작하는 한국식 개척교회 모습이었다. 구석구석에서 교회를 아름답게 꾸며 보겠다며 애쓴 땀내가 묻어있었다. <빌립보교회>가 오클랜드 중심가로 이동했다.
교회당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기술을 초월한 이야기> 보따리가 가득했다. 변한기 목사님은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건네주어야 한다는 소망으로 얘기 보따리를 풀어 나갔다.
“멋있는 부분도 좋지만 귀한 돈 아껴 보겠다며 수고하는 어설픈 몸짓을 보고 하나님은 울먹였을 거예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들은 건강한 비전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름다움’ 단어에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은 누군가, 편한 마음으로 들어 설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장막」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아1:5). 홈리스, 노점상들도 자기 자리가 있다. 다만 단속반이 나타나면 급하게 움직인다.
하나님의 집이었던 장막도 그렇듯 쉽게 이동이 가능했다(창13:12). 하지만 그런 초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의 처소가 되기도 하였다(창4:20 창13:5).
우리교회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다. 살며시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라는 이름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스며든 이름에는 이방인의 느낌이 없다. 하지만 내 교회라는 의식으로 전환은 상황이 달라진다. 나의 소속이 뚜렷해진다.
그 초라한 장막을 나의 장막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를 향한 어떤 사역적인 의미이다. 야곱의 장막, 레아의 장막, 라헬의 장막(창31:33), 그리고 나의 장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절실한 그 무엇이 새로운 세계를 열게 만든다.
사랑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이다. 다윗은 장막이 “사랑스럽다”고 하였다(시84:1). 다윗은 장막을 여호와의 궁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시84:2).
아예 그 장막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다(시84:10). 장막의 문지기이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대장 꼴이다. 하지만 왕궁의 문지기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겉으로 아름답지 않지만 나의 예배 처소가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장막으로 부르던 시절도 하나님은 그 장막을 성산으로 말하고 있다(시15:1). 보잘 것 없는 처소를 왕궁처럼 생각하며 자리를 만들어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예배드렸기 때문이다.
For a day in your house is better than a thousand. It is better to be a door-keeper in the house of my God, than to be living in the tents of sin.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신앙고백이 선명해질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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