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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끼라 3 _ 찬송 감사 경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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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모하는교회
댓글 0건 조회 2,114회 작성일 22-01-2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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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끼라.” 세 번째 퍼즐을 완성해 보겠습니다. 그 세월을 아낀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 아낀 것은 내 삶을 평가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평가 기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나와 관계되는 영원성에 기초합니다.

 

인간의 생애는 태어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소유했던 모든 것의 관계가 사라집니다. 그와 같은 인생을 솔로몬은 전도서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All is to no purpose, said the Preacher, all the ways of man are to no purpose.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헛되다는 표현이 자그마치 다섯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악한세대와 헛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성도에게 하나님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성도의 삶이 경이로울 일입니다. 그 기회가 세월을 아끼라입니다. 그 세월을 아낀 것은 상실되거나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세월을 아껴 그 영원성에 기초된 세 가지 요소를 찾아가는 작업을 구체화 할 것입니다.

 

> ***

1> 찬양

 

Joining with one another in holy songs of praise and of the Spirit, using your voice in songs and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5:19).

 

여기서 시는 언어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마치 시편과 같은 형태입니다. 찬미는 경배,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하는 목적 있는 찬양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성령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 진 곡으로 전인격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의 방법이 의외로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리 높여 큰 목소리(대하7:6. 117:1)로 악기를 사용(대상15:16)해서 무릎 꿇고 송축하는 자세(72:15), (63:4)을 들고, 적어도 구약성경에서 50여개 실례를 찾을 수 있으며 신약에서 20개 이상 찬양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찬양을 할 때 드럼, 전자 악기,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찬송할 때 손을 들고 박수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스펠송은 주일 예배 시간에 부르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찬양 드리는데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편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 앞에 복음과 찬양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항거였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찬양 곡은 시대의 리듬과 운율에 의해 감각적으로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하는 찬양으로 흐르는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세상음악이 아무 제약 없이 버젓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편곡을 해서 가사를 붙여 불리고 있습니다. 직시해야 될 것은 시대에 따라 복음과 찬양의 본질은 흔들릴 수는 없습니다.

 

 

 

***

그렇다면 왜 찬양을 해야 하나요?

 

Even the people whom I made to be the witnesses of my praise.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43:21).”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은 받은 존재입니다. 그 성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찬양의 증인입니다. 불신자가 부르는 찬양을 하나님은 결코 받지 않습니다. 예배 역시 받지 않습니다. 찬양과 예배는 성도의 아주 특별한 특권입니다. 그 많은 찬양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려 보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a. 아름답게 노래하라 > 그렇다고 성악가나 가수처럼 기교 있게 부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교가 섞이기 시작하면 그 찬양은 청중과 나를 만족시키는 찬양으로 전락합니다.

 

여기서 아름답게 노래하라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찬양은 손을 쭉 뻗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과 행위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의 의미로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주인 되심을 찬양으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할 수 없습니다.

 

찬양은 삶을 드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b.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이 세상에 신앙의 유산으로 남기려고 합니까? 어떤 사람은 자식, 개인의 업적, , 건물에 무게 중심을 둡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죽음과 동시에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에베소서를 옥중에서 기록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고백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동일하다고 묘사합니다. 구별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Because by grace you have salvation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given by God: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도표로 그려보면 은혜 + 믿음 = 구원 =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Not by works, so that no man may take glory to himself.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2:9).”

 

역설적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그 일을 주권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를 부름 받은 사실 앞에 종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은혜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c. 칭찬하라 > 칭찬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을 칭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칭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한번은 아들이 유치원 문 앞에서 뒤돌아서더니 엄지손가락을 높였습니다. 그 작고 작은 아들 손으로 아버지의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그 엄지손가락은 아빠가 최고라는 무언의 소리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도중 내 인생에 최고의 순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칭찬하라는 의미입니다.

 

 

 

> ***

2> 감사

 

Giving praise at all times for all things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o God, even the Father;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5:20).”

 

여기서 감사의 조건은 범사입니다. 항상입니다.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나 감사입니다. 하지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항상 감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좋을 때는 감사가 가능하지만 나쁠 때는 불가능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감사는 그래도 견딜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악의 환경에서는 감사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감사를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왜 성경은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명령해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 까요? 필경 항시 감사하라는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결국 항시 감사하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그 감사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합니다.

 

안 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인정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입니다.

 

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항상 감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죄입니다.

 

그 심정으로 땅 밑까지 내려앉으면 감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 사실이 섬광처럼 눈에 선명해 집니다.

 

 

 

***

다시 에베소서 520절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주어는 감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는 항상 감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신앙인의 감사가 유한한 것에 목적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무한의 시간, 영원한 것에 감사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항시 감사는 곧 하나님이 성도에게 반드시 감사로 만들겠다는 하나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그토록 성도의 삶을 감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요?

 

결국 그 감사는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 없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감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속적으로 영광을 선포하는 성도의 행위입니다.

 

 

 

>***

3> 경외

 

Letting yourselves be ruled by one another in the fear of Christ.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경외는 두려움과 동시에 존경하다의 뜻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그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This is the last word. All has been said. Have fear of God and keep his laws; because this is right for every man.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여기서 본분은 인생전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는 하는 것은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몽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어야 합니까?

 

사랑의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치료의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 사업을 잘되게 하는 하나님, 문제 해결의 하나님, 보호하시는 하나님, 또 어떤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적고 보니 하나님에 대한 기대치가 모두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모두 나를 기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만병통치약이면 좋겠습니다. 도깨비 방망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 시각에 머물러있다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외해야 될 하나님을 자꾸 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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