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부흥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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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흥운동 1
다음 성경을 꼼꼼히 읽어 보십시오.
And Seth had a son, and he gave him the name of Enosh: at this time men first made use of the name of the Lord in worship. _ BBE 성경.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역사의 한 정점을 묘사한 완성된 문장입니다. 그 문장을 분리해서 다시 조립해 완성된 초기 문장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 그 때에 at this time
시점, 시기를 나타내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 역사는 설화, 전승,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역사의 진실성입니다. 그 역사는 사실인 것을 나타냅니다.
> 사람들이 men
단수 개인이 아니라 복수 사람들입니다. 대중, 군중, 회중입니다. 개인적인 역사가 아니라 회중적인 역사입니다.
> 비로소 first made
만약 성경을 읽는 독자가 ‘비로소’ 단어를 발견했다면 긴장을 해야 합니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 처음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발생한 역사입니다. 처음 시작된 그 무엇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 불렀더라 use of(BBE). to call upon(KJV)
히브리어 원어적 의미는 “관통하다. 꿰뚫다”입니다. 결국 “마음을 움직이다”의 뜻입니다. 누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 다시 완성된 문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at this time men first made use of the name of the Lord in worship.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에 주목하십시오. 예배에 대한 공식명칭입니다. 예배를 일컫는 동사형 표현입니다. 신구약 성경 최초로 개인이 아닌 회중이 드린 첫 번째 공식예배입니다. 그 때 이후로 성경 곳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예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공식화 되었습니다(창12:8. 창26:25).
Give thanks unto the LORD, call upon his name, make known his deeds among the people.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대상16:8).”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감사로 드리고 “그 행사(하나님 하신 일)에 대해 만민이 알게 선포하라”는 것이 예배의 규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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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회중에 의해 하나님을 찾았던 부흥운동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중심에 예배가 있습니다.
>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인식을 갖고 드린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수 사람들이 드린 예배였습니다.
> 그 실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구체적으로 알고 드린 예배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하는 하나님, 동행하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존귀하신 하나님, 영화로운 하나님입니다.
> 그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드린 예배였습니다. 나는 지금 왜? 하나님이 필요한 분인가? 나는 왜?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가?
결국 예배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현실로 눈을 돌려 보면 예배가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자꾸 청중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청중이 중심이 되면 그 예배는 흥미로 워야 합니다. 재미있어야 합니다. 지루하면 안 됩니다.
세속화되는 예배가 새로운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아예 인터넷 예배도 예배라고 주장합니다. 인터넷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최첨단 시대에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거나 전능한 능력이 없어서 인터넷 시대가 올 것을 모를리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시대가 올지 몰라서 방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교회 외에 다른 대안을 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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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가 최초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 여행을 통해 마음의 자세가 틀려질 것을 기대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시각적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와서 범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시야에 벗어나려고 동산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이런 코미디도 없습니다. 그곳으로 도피하면 하나님 시야를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자각의 척도가 무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시야는 아담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And the LORD God called unto Adam,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아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빨리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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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담의 가정에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And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from the LORD.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여호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있지만 너무나 불길합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는 이미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대한 정보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담이 그 아들이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표현(득남)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And Cain said to his brother, Let us go into the field: and when they were in the field, Cain made an attack on his brother Abel and put him to death.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4:8).”
단순 살인사건이 아닙니다. 사고로 인한 죽음도 아닙니다. 치밀한 계획에 의한 살인이 이루어졌습니다. 계획적인 범죄행위였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동생을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와 같은 살인행위는 희귀한 살인사건입니다.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아담 가정의 비극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당연히 아담의 반응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신앙과 믿음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담의 반응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사건으로 아담이 하나님을 다시 떠난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면 아담가의 비극 속에 좁쌀만 한 희망이 싹트고 있습니다. 가인의 시각으로는 살인사건입니다. 하지만 아벨의 시각으로는 최초의 순교입니다.
하나님은 그 순교의 씨앗을 심고 거대한 계획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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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dam had connection with his wife again, and she gave birth to a son to whom she gave the name of Seth: for she said, God has given me another seed in place of Abel, whom Cain put to death.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4:25).”
막내아들 아벨이 죽고 난 이후에 아담의 심정을 성경이 처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여전히 아담은 그 날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 때의 기억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고통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이 살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셋이라는 이름의 뜻은 아담의 고백처럼 “다른 씨” 혹은 “대신 주셨다”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담은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과 예배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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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had been living for a hundred and thirty years when he had a son like himself, after his image, and gave him the name of Seth: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5:3).”
셋이 태어났을 때 아담의 나이가 130세였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십시오. 아담과 꼭 닮은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아담을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아담을 보호하고 지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셋이 성장하여 결혼을 해서 에노스가 태어났습니다.
And Seth was a hundred and five years old when he became the father of Enosh: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창5:6).”
그렇다면 이 때 아담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 까요? 235세였습니다. 130에 105를 더하면 당시 아담의 나이를 셈할 수 있습니다.
-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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